2015년 12월 17일 목요일

[로어노크 섬] 잃어버린 식민지, 로어노크 섬@ 크로아토안?


[로어노크 섬]


로어노크 섬이란 16세기에 영국이 개척하려 했던 식민지입니다.

현재 위치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아우터뱅크스에 있는 데어 군의 섬이라고 합니다.

백여명의 식민지인들이 사라진 것과 더불어 크로아토안이라는 의미모를 단어로 유명합니다.

우선 로어노크 섬의 식민지화 역사를 보면,

1.1584년 3월 5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월터 롤리 경에게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 땅에 식민지를 건설 할 수 있는 칙허를 허용 함으로서 신세계에서 부를 이끌어 내고, 보물을 실은 스페인 함대에 해적선을 보내 습격할 수 있는 기지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2.1584년 4월 27일, 월터 롤리 경은 북미 해안을 탐사하기 위해 필립 아마다스와 아서 바로우가 이끄는 원정대를 파견했고  7월 4일 로어노크 섬에 도달했습니다.


3.1585년 4월 9일 그렌빌[롤리 경의 가신인듯 하다]은 자신이 타고 있던 타이거호(Tiger)와 로벅호(Roebuck), 레드 라이언(Red Lion), 엘리자베스호(Elizabeth)와 도로시호(Dorothy)를 이끌고 플리머스를 출발했습니다.

[투르투갈 해안 근처에서 심한 폭풍을 만나 타이거호는 나머지 함대들과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후에 5월 11일 머스키토 만 (과야닐리 만)에 도착했습니다.]

[선장들은 우발적인 사태를 만난다면 푸에르토리코에서 재회하기로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배를 기다리고 엘리자베스호가 도착했으나 결국 그렌빌은 나머지 배를 기다리다 지쳐서 6월 7일 다시 출발합니다.]

[6월 26일, 타이거호가 오크라콕 만을 항해하다가 여울에 부딪쳐 대부분의 보급품을 유실하게 됩니다.]

4.식량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렌빌은 1586년 4월에 추가 인원과 보급품을 가지고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로아노크 섬의 북단에 랠프 레인과 107명을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남기기로 결정합니다.

5.1586년 4월이 저물 무렵에도 그렌빌의 구호선이 당도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한편 6월의 마을의 파괴[아쿠아스코콕 마을의 원주민들이 은잔을 훔쳤다는 혐의를 받고 마을이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로 인해 야기된 증오는 요새에 대한 습격에 불을 붙였으며, 식민지 개척자들은 습격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그 습격 직후, 프랜시스 드래이크경(영국의 사략선 선장으로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괴멸시킴)이 카리브해에서 성공적인 해적질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서 야금술사(광석에서 금속 성분을 뽑아내거나 합금을 만들거나 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인 조아킴 간스를 포함한 일행들을 잉글랜드로 되돌려보내 주기로 제안을 했고, 그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후에 그렌빌의 구조함대가 도착하지만 식민지의 버려진 상태를 보고 소규모 분견대만 남기로 해 같이 간 군대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갑니다.]

6.1587년, 롤리 경은 체사피크 만에 식민지를 세우기 위해 115명의 새로운 개척민을 파견합니다.

[이들을 이끈 것은 롤리 경의 친구였던 존 화이트였습니다.]

[화이트는 크로아탄 부족들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했으며, 전년에 전투를 벌였던 랄프 레인 부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위해 노력했습니다만 한 개척민이 인디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개척민들은 화이트 지사에게 영국으로의 귀환과 도움을 요청 할 것을 제안합니다. 화이트 지사는 손녀를 포함해서 115명의 개척민들을 남기고 영국으로 귀환합니다.]

7.1587년 말(겨울이죠) 화이트 지사는 영국으로 향해합니다.

[구조선 계획은 겨울철 항해를 거부한 선장에 의해 지연됩니다.]

[당시 스페인 무적함대와 교전한 배들로 인해 로어노크로 향할 수 있는 배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후 3년간 지연되고 마침내, 사략선 원정대를 데리고, 카리브해에서 돌아 오는 길에 로어노크 섬 앞바다에 들를 수 있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8.화이트는 손녀의 3번째 생일인 1590년 8월 18일 로어노크 섬에 상륙했지만, 개척지는 버려져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대원들도 남자 90명, 여자 17명, 어린이 11명의 개척민들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전투가 일어난 것 같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실종에대한 유일한 단서는 마을 둘러 친 울타리 기둥 위에 새겨진 ‘크로아토안’라는 글자였으며, ‘크로’는 나무 근처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식민지를 떠나기 전에, 화이트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 강제로 떠나야 할 일이 생긴다면, 몰타 십자를 나무 근처에 새겨두게 지시했고, 그것이 발견되지 않자 크로아토안 섬(현재의 해터러스 섬)에 이주한 것으로 보았으나 거친 폭풍우에 군사들의 항의로 떠나게 됩니다.]

9.12년이 흐른 뒤(1602년), 롤리 경은 그의 식민지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알아내고자 했으나 기상악화로 실패합니다.

[이후 반란 혐의로 체포되어 탐사대를 보낼 수 없었고 결국 사라진 개척민들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로어노크 섬 미스테리의 역사인데 다수의 개척민 실종과 CROATOAN 이라는 의문의 단어로 베니싱 현상의 대표적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척민 실종에 대한 것은 몇몇 가설이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가설은 그들이 지역의 크로아탄 족 또는 핫테라스 족 또는 다른 알곤 족 인디언에 의해 분산 흡수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책임자 윌리엄 스트라치는 1612년 페카리카닉과 오차나호엔 인디언 정착촌에서 쓴 《영국령 버지니아 여행의 역사》(The historie of travaile into Virginia Britannia)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돌 벽을 가진 2층의 가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인디언들은 로어노크 정착민들로부터 그런 기술을 배웠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또한 동일한 시기에 여러 인디언 거주지에서 유럽인 포로들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1612년 스트라치는 리타녹에 있는 에노 족 정착촌에서 에야노코라고 불리는 추장의 보호 하에 있는 4명의 잉글랜드인 성인 남성과 2명의 소년, 1명의 소녀가 목격되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F. 로이 존슨의 저서 《진실과 전설 속의 잃어버린 식민지》에서 공동 저자 토마스 C. 패러 모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 1610년까지 타스카로라 족 국가에서 잃어버린 식민지들의 일부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가 인상적이다. 1608 년에 제임스타운의 개척자 프랜시스 넬슨가 그린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내륙 지도는 이 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증거이다.]


또 다른 가설로는 해상조난, 기아에 따른 자멸입니다. 위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구조가 상당히 지연됩니다. 따라서 기다리다 지치거나 위험한 상황이 오자 ( 기록을 남기지도 못 할 정도로 급했다거나 - 가능성은 낮다 ) 스스로 남겨진 1척의 소형 범선과 몇척의 소형 선박들로 탈출을 시도했다는 설입니다.
(소형 범선의 크기다)

이것을 타고



이 먼 거리를 항해하다가 끝내는 자멸했다는 가설입니다. 하지만 버지니아 주로 이주했다는 설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CROATOAN

저 이상한 단어는 당시 섬의 원주민인 크로아탄 부족을 뜻하는 단어로 쓰였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상황상 보자면 나무에 기록된 CROATOAN이라는 단어는 크로아탄을 따라 이주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고 추측합니다. 실제로 크로아탄 부족은 1598년에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에 시달려 부족민의 수가 크게 줄었고 식민지의 압력에 의해 이주합니다. 17세기 초에 멸종한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개척민들의 실종과 겹치는 기간입니다. 일부 학자는 부족민들이 노스 캐롤라이나의 내부를 향해 이주, 1650년에 강둑을 따라 정착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Dna 연구를 통해서 사라진 개척민들의 후손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베니싱 현상의 대표적 사례인 로어노크 섬에 대한 포스트를 마치겠습니다. 
끝내 화이트 지사는 개척민들을 만날 수 없었을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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